"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이 한 문장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거짓말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후,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한 발언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고,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사건의 발생과 은폐 시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7년 1월 14일에 발생했습니다. 당시 21세였던 박종철은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인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불법으로 연행되었습니다. 그는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다가 결국 사망했습니다.
사건 직후 경찰은 이를 은폐하려 했습니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거짓 발표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 거짓말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진실의 밝혀짐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데에는 의료진의 양심적인 증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중앙대부속 용산병원의 오연상 의사는 박종철의 사체를 검안하면서 "복부가 매우 부풀어 있었으며 폐에서 살아있는 정상인에게서는 들을 수 없는 수포음을 들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또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황적준 박사는 부검 결과 물고문과 전기고문의 흔적이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러한 증언들로 인해 경찰은 결국 물고문 사실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건 발생 5일 만에 수사경관 조한경과 강진규가 구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습니다.
은폐·조작 사실의 폭로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가 폭탄선언을 합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경찰의 은폐·조작 사실을 폭로한 것입니다. 고문에 가담한 경관이 2명이 아니라 5명이며,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박원택 경정 등 대공간부 3명이 사건을 축소·조작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은폐·조작이 단순히 경찰 내부의 일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안기부, 법무부, 내무부, 검찰, 청와대 비서실 등 권력 기관이 총동원되어 조직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는 당시 전두환 정권의 부도덕성과 비민주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6월 민주항쟁으로의 발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단순한 한 개인의 비극적인 죽음을 넘어, 한국 사회 전체의 양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시민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결국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전국의 많은 교회와 성당, 사찰 등에서는 박종철군 추모 예배와 추모 법회, 고문 사례 발표회 등을 열었습니다. 노동계와 학생들은 잇따라 박종철 추모 집회를 열었습니다. 김대중·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은 1월26일 김대중 자택에서 회동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대책 등을 논의하고 2월7일 신민당과 재야가 합동으로 박종철 추모대회를 개최키로 합의합니다.
6·29 선언과 민주화의 진전
국민들의 끈질긴 저항에 굴복한 전두환 정권은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는 '6·29 선언'을 발표하게 됩니다. 이로써 한국은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질적 민주주의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박종철 사건의 의의와 교훈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겼습니다.
첫째, 권력의 남용과 인권 유린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둘째, 진실은 결코 영원히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셋째, 시민들의 단합된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증명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개인의 용기 있는 행동이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박종철과 같은 민주열사들의 희생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들의 꿈이었던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동시에 이런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우리의 책임이자 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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