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기억

고문기술자 이근안: 국가 폭력의 어두운 그림자

미지의 방정식 2024. 12. 13. 18:19

“매우 야만적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1999년 고(故) 김근태 전 국민회의 부총재가 남긴 말입니다. 그는 1980년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한 경험을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그 고문의 중심에는 '고문기술자'로 불렸던 이근안이 있었습니다.

 

이근안은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면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박정희 유신 정권과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가와 간첩 혐의자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자행하며 악명을 떨쳤습니다. 그의 별명은 '인간백정', '지옥에서 온 장의사' 등으로 불렸으며, 이는 그가 얼마나 잔혹한 수단으로 사람들을 다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근안의 등장과 악명

1938년 인천에서 태어난 이근안은 경찰 순경으로 시작해 대공수사 분야에서 빠르게 승진했습니다.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말까지 경기도경찰청 대공분실장으로 활동하며 간첩 조작 사건과 민주화 운동 탄압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특히 그는 전기고문, 물고문, 관절 빼기 등 잔혹한 고문 기술을 사용해 피해자들에게 허위 자백을 강요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사례는 김제 가족 간첩단 사건과 함박도 간첩 조작 사건입니다. 이 사건들은 모두 고문의 결과로 만들어진 허위 자백에 기반하고 있었으며, 이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피해자들은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렸으며, 일부는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습니다.

도피와 자수

1988년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 군사정권 시절의 고문 행위들이 폭로되면서 이근안은 잠적했습니다. 그는 10여 년간 도피 생활을 이어갔으며, 결국 1999년 자수하여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도피 과정에서도 경찰과 검찰이 적극적으로 그를 체포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습니다.

1988년 12월 21일 한겨레신문 1면 기사의 일부

고문의 유산

이근안의 고문 행위는 단순히 개인적 범죄를 넘어 국가 폭력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냅니다. 그는 국가 권력의 방패 아래서 자신을 "애국자"로 정의하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위는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으며, 수많은 개인과 가족들에게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특히 그의 고문 피해자 중 한 명인 김근태는 이후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으며, 그의 증언은 한국 사회가 과거사 청산에 나서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책임과 반성

2000년대 들어 이근안은 목사로 변신했으나, 여전히 자신을 "고문기술자가 아닌 애국자"로 칭하며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사회적 비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또한 그는 퇴직금 소송이나 국가 배상금 구상금 문제 등 법적 분쟁에서도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 했습니다.

 

교훈과 과제

이근안 사건은 단순히 한 개인의 범죄를 넘어 국가 폭력과 인권 침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줍니다. 그의 사례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이 어떻게 남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잊지 않고 기록하며,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진정한 치유와 정의를 제공하기 위해 지속적인 과거사 청산 작업이 필요합니다. 이는 단순히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을 넘어, 사회적 화해와 회복을 위한 노력이 되어야 합니다. 이근안이라는 이름은 이제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페이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이 주는 교훈은 분명합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결코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이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