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두환 대통령의 충복이다. 그분이 잘못한 것이 있다면 나도 잘못한 것이다."
이 말은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의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1936년 9월 27일 전라남도 고흥군에서 태어난 장세동은 '전두환의 오른팔'로 불리며 제5공화국 시절 권력의 정점에 섰던 인물입니다.
군 생활과 전두환과의 인연
장세동은 1952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인생에 결정적 전환점이 된 것은 1958년 전두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베트남 전쟁 파병 중 깊은 유대 관계를 형성했고, 이후 장세동은 전두환의 가장 신뢰받는 측근으로 자리잡았습니다.
12·12 군사반란과 5·17 쿠데타
1979년 12·12 군사반란과 1980년 5·17 쿠데타 과정에서 장세동은 전두환의 핵심 측근으로 활약했습니다. 당시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이었던 그는 쿠데타 성공을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는 후일 "장태완 장군이 경복궁을 공격하려 했을 때, 탱크 한 대당 72발씩의 포탄을 적재케 하고, 이미 한 발은 탑재한 상태였다. 일촉즉발의 불바다가 되었을 것"이라고 회고했습니다.
5공 실세로서의 활동
장세동은 전두환 정권 하에서 대통령경호실장(1981-1985)과 국가안전기획부장(1985-1987)을 역임하며 권력의 2인자로 불렸습니다. 그는 이 시기 동안 금강산 댐과 평화의 댐 공작,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 용팔이 사건 등 각종 국가 안보 문제와 간첩 사건을 주도했습니다.
절대적 충성심과 논란
장세동의 전두환에 대한 충성심은 거의 맹목적이었습니다. 5공 청문회에서 그는 "사나이는 자신을 알아준 사람을 위해 죽는 법이다", "차라리 내가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는 한이 있어도 각하가 구속되는 것은 막겠다"고 발언해 화제를 모았습니다.
그의 이러한 충성심은 전두환 정권 몰락 이후에도 변함없이 지속되었습니다. 2021년 전두환 전 대통령 사망 당시에도 그는 조문객으로 참석하여 마지막까지 충성심을 보였습니다.
권력 남용과 법적 처벌
장세동은 안기부장 시절 언론 통제, 반체제 인사 탄압 등 권력 남용 의혹을 받았습니다. 1993년에는 용팔이 사건 개입이 밝혀져 법정에 섰고, 1994년 4월 12일 대법원에서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아 복역했습니다.
최근의 입장
최근 한 인터뷰에서 장세동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밝혀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장세동의 삶은 권력과 충성심, 그리고 그 이면의 그림자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그의 행적은 우리에게 권력자에 대한 충성과 국민에 대한 책임 사이에서 공직자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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